<예수 부활 대축일>
<부활, 그리고 기쁨>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7-18).”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기쁨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쁜 소식” 중에 첫 번째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기쁨”을 세속의 즐거움, 쾌락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희희낙락, 떠들썩한 술잔치, 고성방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기쁨은 희망과 믿음입니다. 희망과 믿음에서 오는 인내와 용기입니다.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입니다.
기쁨의 여인,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도 희망, 믿음, 인내, 용기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기쁨의 어머니이십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필리 2,16).”
그리스도교의 기쁨은 깊은 바다 속 같은 고요함입니다. 물의 표면에서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더라도 물 속 깊은 곳에서는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짜증나는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우울한 일, 남을 미워하는 일, 화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에 노출된 물의 표면에서의 일일 뿐입니다. 신앙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흔들림 없는 평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평온함이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기쁨의 여인,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서도 슬프고 괴롭고 짜증나고 우울하고 화나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께서는 늘 고요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천주교 성인 성녀가 대략 6천명 이상 되는데, “찡그린 성인은 없다.” 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항상 기쁨 속에서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들은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슬프고 우울하고 답답한 일을 겪어도, 짜증나고 화나고 억울한 일을 겪어도, 내적인 평화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덕은 기쁨과, 기쁨은 성덕과 비례합니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은 박해, 도피생활, 굶주림, 감옥생활, 고문, 처형 순간에도 바로 그 기쁨을 잃지 않았고, 그 기쁨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켰습니다. 그것이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 모습 때문에 감동이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기쁨은 깨끗한 마음, 순수한 사랑입니다. 마음이 욕망으로 들끓는다면 “기쁨”은 사라집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집착과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고집할 때 “기쁨”은 사라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합니다. 구름이 별빛을 가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별 자체를 가리지는 못합니다. 바람 때문에 별빛이 흔들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별을 흔들지는 못합니다.
밤거리의 현란한 네온사인은 전기 공급을 끊으면 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은 자체발광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기쁨은 바로 그런 별빛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때 길잡이를 해줄 수 있는 별빛... ------------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시고 돌아선 제자들은 아마도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희망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그 무덤에서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절망할 줄 모르는 위대한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지진이 흔들고 지나간 땅에도 샘물은 다시 솟고, 폭풍이 휩쓸고 간 들판에도 꽃은 다시 피는 법입니다.
옛날 어떤 철학자는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절망은 자기 자신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 병입니다. 절망이라는 병을 고치는 특효약은 희망뿐입니다. 희망은 믿음에서 옵니다. 믿음이란 그냥 다 맡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시작과 끝의 주인은 주님”이시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이사 42,3) 분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 삶은 끝날 수도, 끝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을 뿐이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희망이란 보이지 않는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희망입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게 된다는 희망으로 살아가자고 말하지 않고 희망으로 구원을 이미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희망이 실현되는 것은 미래의 일이지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오늘의 일입니다. 그게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확실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이 백 퍼센트 실현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이미 받았다면 우리는 오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지만 그 기쁨은 오늘 우리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나중의 일이지만 그 기쁨은 오늘의 것입니다. 그 희망이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어서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살다가 울고 싶어도, 아니 지금 울고 있어도,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도, 화내고 싶어도, 억울해도, 짜증나도, 우울해도... 그래도 기뻐해야 합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르면... 예수님께서 깊은 고요함과 평온함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자기를 뒤흔들어도 믿음으로 버티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죽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죽이려고 해도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나를 죽이지는 못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바람 불고 구름 끼는 날씨를 탓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별입니다. 하늘나라의 스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


"기쁜소식" 중에 첫번째 기쁜소식은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함께 부활을 축하드리며, 기쁨을 나눕니다...